물건값이나 공사비가 몇 달째 쌓이면 거래처끼리 자리를 한 번 만듭니다. 그 자리에서 나오는 결론은 대개 비슷합니다. 밀린 금액을 한 덩어리로 묶어 빌린 돈으로 치고 이자와 갚을 날짜를 새로 정하자는 것입니다. 민법에는 이 합의를 위한 조문이 있으며 이름이 준소비대차입니다. 무엇이 달라지고 무엇이 그대로 남는지, 계약서에 무엇을 적어야 나중에 다투지 않는지를 살펴보겠습니다.
어떤 약정이 여기에 해당하나
근거는 제605조 한 문장입니다.
당사자 쌍방이 소비대차에 의하지 아니하고 금전 기타의 대체물을 지급할 의무가 있는 경우에, 당사자가 그 목적물을 소비대차의 목적으로 할 것을 약정한 때에는 소비대차의 효력이 생깁니다. 요건을 뜯어보면 두 가지입니다. 하나는 빌려준 것이 아닌 원인으로 생긴 지급의무가 이미 있을 것, 다른 하나는 그 의무를 빌린 것으로 다루자는 당사자의 합의가 있을 것입니다.
주의할 부분은 대상의 범위입니다. 조문은 금전이나 그 밖의 대체물을 지급할 의무만을 적어 두었습니다. 특정한 부동산을 넘겨줄 의무나 어떤 일을 해 줄 의무는 성질이 달라 이 틀에 들어오지 않습니다.
소비대차와 준소비대차
제598조가 정한 소비대차는 금전이나 대체물의 소유권을 넘겨주고 같은 종류와 품질, 수량으로 돌려받기로 하는 계약입니다. 준소비대차에서는 새로 건네는 돈이 없습니다. 이미 받을 것이 있는 상태에서 그 채무의 옷만 갈아입히는 합의이므로, 돈이 오가지 않았다는 점이 일반 대여금 사건과 다릅니다.
실무에서는 어떤 채무가 옷을 갈아입나
가장 흔한 것이 외상 대금입니다. 자재를 대 온 업체가 몇 달 치를 모아 차용증 형태로 정리하는 방식입니다.
공사 기성금이나 용역비도 자주 이 경로를 탑니다. 발주처에 당장 여력이 없을 때 원금을 확정하고 분할 상환표를 붙이는 쪽이 서로에게 낫기 때문입니다. 밀린 차임이나 동업을 청산하며 확정한 정산금도 대상이 됩니다.
반대로 금액이 확정되지 않은 청구권을 이 방식으로 묶으면 뒤가 복잡해집니다. 원인 채무가 없었다면 그 위에 세운 약정도 흔들립니다. 정산서를 먼저 맞추고 옮기십시오.
원래의 채무는 사라지나 남아 있나
조문은 소비대차의 효력이 생긴다고만 적어 두었습니다. 기존 채무가 어떻게 되는지는 한 글자도 적혀 있지 않습니다.
그래서 이 부분은 당사자의 의사를 해석해 정합니다. 옛 채무를 지우고 새 채무만 남기기로 했는지, 아니면 새 채무를 세우되 옛 채무도 나란히 두기로 했는지에 따라 결론이 갈립니다. 합의서에 아무 말이 없으면 몇 년 뒤 서로 다른 주장을 하게 됩니다.
딸려 있던 것들의 운명도 여기서 결정됩니다. 원인 채무에 붙어 있던 담보와 보증이 새 채무로 이어지는지를 미리 적어 두십시오. 한 줄이면 됩니다.
| 따져 볼 항목 | 합의서에 적을 내용 |
|---|---|
| 원인 채무 | 어떤 거래에서 생긴 얼마인지 특정합니다. |
| 옛 채무의 존속 | 소멸시키는지 병존시키는지 적습니다. |
| 담보와 보증 | 그대로 유지하는지 명시합니다. |
| 이자와 지연손해금 | 이율과 기산일을 따로 씁니다. |
| 상환 방법 | 분할 횟수와 기한이익 상실 조건을 넣습니다. |
갚을 날짜와 이자는 어떻게 정하나
새로 만든 채무이므로 반환 조건을 처음부터 짤 수 있습니다. 이것이 이 제도를 쓰는 가장 큰 이유입니다.
제603조 제1항은 차주가 약정한 시기에 같은 종류와 품질, 수량의 물건을 반환하도록 합니다. 제2항은 반환시기의 약정이 없는 때를 다룹니다. 대주는 상당한 기간을 정하여 반환을 촉구하여야 하고, 차주는 언제든지 반환할 수 있습니다. 기한을 비워 두면 절차가 한 단계 늘어납니다.
이자는 약정이 있어야 붙습니다. 이율에는 법률이 정한 상한이 있으니 한도를 넘지 않는지 확인하십시오.
시효는 어느 기간으로 다시 잡히나
실질적인 이득이 이 대목에 있습니다.
제163조는 3년의 단기소멸시효를 정하면서 제6호에 생산자 및 상인이 판매한 생산물 및 상품의 대가를 넣어 두었고, 제3호에는 도급받은 자와 공사의 설계 또는 감독에 종사하는 자의 공사에 관한 채권을 넣었습니다. 물품 대금이나 공사 대금이 여기에 걸립니다. 반면 제162조 제1항은 채권 일반의 소멸시효를 10년으로 정합니다.
준소비대차로 옮기면 새로 생긴 채무의 성질에 따라 기간이 정해지므로, 짧게 잡혀 있던 시계가 다시 세팅될 여지가 생깁니다. 다만 상인 사이의 거래에는 상법이 별도의 기간을 두고 있어 항상 10년이 되는 것은 아닙니다.
합의 자체에도 효과가 있습니다. 제168조 제3호는 승인을 소멸시효의 중단사유로 정하고, 제178조 제1항은 중단까지 지나간 기간을 빼고 중단사유가 끝난 때부터 새로 진행하도록 합니다. 밀린 금액을 확인해 주는 서면에 서명하는 행위가 여기에 닿습니다.
돈 대신 물건으로 갚기로 했다면
정산 자리에서 재고나 장비를 넘기겠다는 제안이 나오기도 합니다. 민법은 이 국면을 따로 다룹니다.
제606조는 금전대차에서 차주가 금전에 갈음하여 유가증권이나 그 밖의 물건을 인도받은 때 그 인도 시의 가액을 차용액으로 삼도록 합니다. 액면이 아니라 넘겨받던 시점의 실제 값이 기준입니다.
갚을 때 물건으로 대신하기로 미리 약속하는 경우에는 제607조가 상한을 겁니다. 차용물에 갈음하여 다른 재산권을 이전하기로 예약한 때 그 재산의 예약 당시 가액이 차용액과 이자의 합산액을 넘지 못합니다. 제608조는 이를 어긴 약정으로서 차주에게 불리한 것은 환매 그 밖의 어떤 명목이라도 효력이 없다고 못 박습니다.
주의
차용증만 새로 쓰고 원인 거래의 자료를 버리는 경우가 있습니다. 상대가 원인 채무 자체를 다투기 시작하면 세금계산서와 거래명세서, 현장 사진이 다시 필요해집니다. 새 문서를 만들더라도 옛 자료는 그대로 보관하십시오.
합의서에 무엇을 담아야 하나
형식은 자유롭지만 빠지면 곤란한 항목이 정해져 있습니다.
- 원인 채무의 발생 원인과 기간, 확정된 원금을 특정합니다.
- 그 채무를 소비대차의 목적으로 한다는 문장을 명시적으로 넣습니다.
- 기존 담보와 보증을 유지할 것인지 한 줄로 정리합니다.
- 이율, 지연손해금률, 각 기산일을 나누어 적습니다.
- 분할 상환표와 기한이익 상실 사유를 붙입니다.
- 서명일과 당사자 인적사항, 연대보증인의 서명 위치를 확인합니다.
금액이 크다면 공증을 붙이는 방법도 있습니다.
정리
준소비대차는 이미 있는 지급의무를 빌린 것으로 바꾸는 합의이고, 근거는 제605조입니다. 새로 건네는 돈이 없다는 점만 다를 뿐 효력은 소비대차와 같습니다.
바꾸면서 얻는 것은 상환 조건을 다시 설계할 기회입니다. 기한과 이율, 분할 방식이 새로 정해지고 시효 기간도 새 채무의 성질을 따라갑니다. 반대로 잃기 쉬운 것은 원인 채무에 붙어 있던 담보와 보증입니다. 물건으로 갚기로 하는 약정에는 제607조와 제608조의 제한이 걸립니다. 문안 한 줄이 몇 년 뒤의 결론을 바꾸므로, 서명 전에 변호사와 함께 조항을 맞춰 보시기 바랍니다.
참조 조문
민법 제162조, 제163조, 제168조, 제178조, 제598조, 제603조, 제605조, 제606조, 제607조, 제608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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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주 묻는 질문
밀린 물품값을 차용증으로 다시 쓰면 무엇이 달라집니까?
갚을 날짜와 이율을 새로 정할 수 있고, 새로 생긴 채무의 성질에 따라 소멸시효 기간이 다시 잡힙니다. 다만 원인 채무에 붙어 있던 담보와 보증이 이어지는지는 합의서에 적어 두지 않으면 다투게 됩니다.
원래의 외상 채무는 자동으로 없어지나요?
조문은 그 부분을 정해 두지 않아 당사자의 의사를 해석해 결정합니다. 옛 채무를 소멸시킬 것인지 새 채무와 나란히 둘 것인지를 문서에 명시하시는 편이 안전합니다.
갚을 날짜를 적지 않으면 어떻게 되나요?
제603조 제2항에 따라 상당한 기간을 정해 반환을 촉구하는 절차를 먼저 밟아야 합니다. 반대로 차주는 언제든지 갚을 수 있으므로, 받는 쪽에서는 기한을 명시해 두는 것이 회수에 유리합니다.
돈 대신 부동산을 넘기기로 미리 약속해도 됩니까?
가능하지만 한도가 있습니다. 제607조는 예약 당시 그 재산의 가액이 차용액과 이자를 합한 금액을 넘지 못하게 하고, 제608조는 이를 어긴 약정 중 차주에게 불리한 것을 무효로 정하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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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검토: 한병철 변호사 · 2026-09-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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