밀린 물품대금 8,000만원을 갚기 어렵다는 거래처와 새로 합의서를 쓰는 자리가 있습니다. 대금 채무를 없애는 대신 3년 분할의 대여금 채무로 바꾸고, 이율과 변제 방법도 새로 정하는 방식입니다. 채권자는 종전 채무에 붙어 있던 근저당과 연대보증이 당연히 새 채무에도 따라온다고 여기기 쉽습니다. 그런데 민법은 이런 합의를 경개라고 부르며 옛 채무를 소멸시키고, 담보는 옛 채무를 따라 함께 사라지는 것이 원칙입니다. 담보를 살리려면 무엇을 적어야 하는지, 채무인수와는 어디가 다른지를 조문을 따라 정리해 보겠습니다.
경개는 무엇을 없애는 계약인가
제500조가 정의입니다. 당사자가 채무의 중요한 부분을 변경하는 계약을 한 때에는 구채무는 경개로 인하여 소멸한다고 정합니다.
문장의 무게는 소멸이라는 단어에 있습니다.
변제 기한을 늦추거나 이율을 조금 손보는 정도는 종전 채무가 그대로 이어지는 변경입니다. 반면 물품대금을 대여금으로 바꾸거나 돈을 줄 채무를 물건을 넘길 채무로 바꾸면 채무의 정체가 달라져 옛것이 사라지고 새것이 생깁니다. 판단에는 당사자가 옛 채무를 없애려는 뜻이 있었는지가 함께 고려됩니다.
경개
옛 채무를 소멸시키고 그 자리에 새 채무를 만드는 계약입니다. 채무의 내용이 바뀌는 경우, 채무자가 바뀌는 경우, 채권자가 바뀌는 경우로 나뉘며 민법은 각각 제500조, 제501조, 제502조에서 다룹니다.
담보는 왜 옛 채무와 함께 사라지나
담보가 채무에 매달려 있기 때문입니다. 저당권을 예로 들면 제369조가 저당권으로 담보한 채권이 시효의 완성 기타 사유로 소멸한 때에는 저당권도 소멸한다고 정합니다. 경개로 인한 소멸도 기타 사유에 들어갑니다.
보증도 같습니다. 제428조 제1항은 보증인이 주채무자가 이행하지 않는 채무를 이행할 의무가 있다고 정하므로, 주채무가 없어지면 대신 이행할 대상 자체가 없어집니다. 제430조가 보증인의 부담을 주채무의 한도로 줄이는 것도 같은 원리입니다.
그래서 아무 말 없이 합의서만 쓰면 결과가 이렇게 됩니다.
- 옛 채무에 설정된 근저당은 피담보채권이 사라져 말소 대상이 됩니다.
- 옛 채무의 연대보증인은 보증할 주채무가 없어져 책임을 벗습니다.
- 새 채무는 담보가 없는 채무로 출발합니다.
제505조는 어떤 통로를 열어 두었나
합의로 옮기는 길입니다. 제505조는 경개의 당사자가 구채무의 담보를 그 목적의 한도에서 신채무의 담보로 할 수 있다고 정합니다. 담보를 새로 설정하는 것이 아니라 있던 담보를 이어 붙이는 방식입니다.
두 가지 한계가 붙어 있습니다.
하나는 목적의 한도입니다. 옛 채무가 8,000만원이었고 근저당의 채권최고액이 1억원이었다면 새 채무를 1억 5,000만원으로 늘리더라도 담보는 종전 범위를 넘지 못합니다. 다른 하나는 단서에 있습니다. 제3자가 제공한 담보는 그 승낙을 얻어야 합니다. 채무자의 부동산에 설정된 근저당은 당사자끼리 옮길 수 있지만, 채무자의 부모가 제공한 부동산이나 친구가 선 보증은 그 사람이 동의하지 않으면 새 채무로 따라오지 않습니다.
주의
승낙은 새 합의서에 그 사람이 직접 서명하는 방식으로 남겨야 합니다. 보증인에게 전화로 알렸다거나 채무자가 대신 동의했다는 설명으로는 제505조 단서를 채우기 어렵습니다. 보증이라면 제428조의2가 요구하는 서면 방식도 함께 갖춰야 합니다.
채무자가 바뀌는 경개는 누가 합의하나
제501조가 답합니다. 채무자의 변경으로 인한 경개는 채권자와 신채무자 사이의 계약으로 할 수 있고, 다만 구채무자의 의사에 반하여 하지 못합니다. 옛 채무자가 반대하지만 않으면 성립합니다.
채권자가 바뀌는 쪽은 제502조와 제503조입니다.
| 유형 | 근거 | 특별히 갖출 것 |
|---|---|---|
| 내용의 변경 | 제500조 | 중요한 부분이 바뀌었을 것 |
| 채무자의 변경 | 제501조 | 구채무자의 의사에 반하지 않을 것 |
| 채권자의 변경 | 제502조·제503조 | 제3자 대항에 확정일자 있는 증서, 채무자 승낙의 효과는 제451조 제1항 준용 |
채권자 변경형에서 제451조 제1항의 준용은 의미가 큽니다. 채무자가 이의를 보류하지 않고 승낙하면 옛 채권자에게 내세울 수 있던 사유를 새 채권자에게 내세우지 못하게 됩니다.
채무인수와는 어디가 다른가
채무자 변경형 경개와 채무인수는 겉모습이 닮았습니다. 그러나 담보의 운명을 정하는 조문이 다릅니다.
| 구분 | 채무자 변경의 경개 | 채무인수 |
|---|---|---|
| 옛 채무 | 소멸하고 새 채무가 생김 | 동일성을 유지한 채 이전 |
| 채무자가 제공한 담보 | 제505조 합의로 이전 가능 | 별도 규정 없음 |
| 보증과 제3자 담보 | 제505조 단서, 승낙 필요 | 제459조, 동의 없으면 소멸 |
제459조는 전채무자의 채무에 대한 보증이나 제3자가 제공한 담보는 채무인수로 인하여 소멸하되, 보증인이나 제3자가 채무인수에 동의한 경우에는 그러하지 아니하다고 정합니다. 결론만 보면 경개와 같습니다. 어느 길이든 남이 제공한 담보를 지키려면 그 사람의 동의를 문서로 받아야 합니다.
새 채무가 무너지면 옛 채무는 되살아나나
제504조가 안전장치입니다. 경개로 인한 신채무가 원인의 불법 또는 당사자가 알지 못한 사유로 성립하지 않거나 취소된 때에는 구채무는 소멸되지 아니한다고 정합니다.
범위는 좁습니다.
새 채무가 처음부터 무효였거나 착오 같은 사유로 취소된 경우에 한합니다. 새 채무가 유효하게 생겼는데 채무자가 갚지 않는 것은 여기에 들어가지 않습니다. 그때는 새 채무의 불이행을 다툴 뿐이고 이미 사라진 담보를 불러올 수는 없습니다.
합의서에는 무엇을 적어야 하나
조문을 거꾸로 읽으면 항목이 나옵니다.
- 옛 채무를 특정하고 이를 소멸시키며 새 채무로 갈음한다는 뜻을 분명히 적습니다. 단순 변경인지 경개인지를 둘러싼 다툼을 막기 위해서입니다.
- 옛 채무의 근저당과 질권을 새 채무의 담보로 한다는 조항을 두고, 채권최고액과 담보 범위가 종전과 같다는 점을 적습니다.
- 보증인과 물상보증인을 합의서의 당사자로 넣어 직접 서명하게 합니다.
- 등기가 필요한 담보는 합의 직후 피담보채권 변경의 등기를 신청합니다.
확인할 것
· 옛 채무에 붙은 담보의 종류와 제공자가 누구인지
· 채권최고액과 새 채무 금액의 차이
· 보증인과 물상보증인이 합의서에 서명했는지
· 새 채무의 원인이 무효나 취소 사유를 안고 있지 않은지
정리
경개는 옛 채무를 없애는 계약이고, 담보는 그 채무에 매달려 있어 함께 사라지는 것이 원칙입니다.
살리려면 제505조에 따라 합의로 옮겨야 하고, 그 범위는 종전 담보의 목적을 넘지 못하며 남이 제공한 담보는 그 사람의 승낙이 필요합니다. 채무인수를 택하더라도 제459조가 같은 결론을 내립니다. 새 채무가 무효나 취소로 무너진 때에만 제504조가 옛 채무를 되돌려 줍니다.
합의서를 쓰기 전에 담보 목록부터 만들어 보시고, 금액이 크거나 제공자가 여럿이라면 문안을 변호사와 함께 다듬으시기 바랍니다.
참조 조문
민법 제369조, 제428조, 제428조의2, 제430조, 제451조, 제459조, 제500조, 제501조, 제502조, 제503조, 제504조, 제505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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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주 묻는 질문
변제기만 1년 늦추기로 합의했습니다. 근저당이 없어지나요?
기한을 늦추는 정도는 중요한 부분의 변경으로 보기 어려워 종전 채무가 이어지고 근저당도 남습니다. 다만 합의서에 옛 채무를 소멸시킨다는 문구가 있으면 달리 볼 수 있습니다.
보증인이 새 합의서에 서명을 거부합니다.
제505조 단서에 따라 제3자가 제공한 담보는 승낙이 있어야 새 채무로 옮겨집니다. 서명이 없으면 그 보증은 옛 채무와 함께 소멸하므로, 다른 담보를 붙이거나 경개 대신 단순 변경으로 구성하는 방안을 검토해야 합니다.
채무자가 새 채무도 갚지 않습니다. 옛 담보를 다시 쓸 수 있나요?
제504조는 새 채무가 성립하지 않거나 취소된 경우에만 옛 채무가 소멸하지 않는다고 정합니다. 유효하게 생긴 새 채무를 갚지 않는 것은 여기에 해당하지 않아 옛 담보가 되살아나지 않습니다.
채권자가 바뀌는 경개는 채무자 동의가 필요한가요?
채무자의 승낙이 요건은 아니지만, 이의를 보류하지 않고 승낙하면 제503조가 준용하는 제451조 제1항에 따라 옛 채권자에게 내세울 수 있던 항변을 잃습니다. 제3자에게 대항하려면 확정일자 있는 증서가 필요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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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검토: 한병철 변호사 · 2026-09-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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