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효라는 판단은 끝을 뜻하는 말처럼 들립니다. 애초에 없었던 것으로 다루니 그 위에 쌓인 계산도 함께 무너집니다. 그런데 민법 총칙에는 그렇게 간단히 끝내지 않는 조문 세 개가 나란히 붙어 있습니다. 하나는 무효가 문서 전체로 번지는 것을 막고, 다른 하나는 죽은 약정을 다른 모양으로 되살리며, 마지막 하나는 당사자가 뒤늦게 붙잡을 때의 처리를 정합니다. 이 세 조문이 어떤 사정을 염두에 두고 만들어졌는지 문언부터 짚어 보겠습니다.
무효는 무엇이 다른가
다툴 사람이 따로 없다는 점이 다릅니다.
취소할 수 있는 행위는 일단 효력이 있고, 정해진 사람이 취소한다고 말해야 비로소 무너집니다. 민법 제146조가 취소권을 추인할 수 있는 날로부터 3년, 행위를 한 날로부터 10년 안에 행사하도록 시간까지 정해 둔 것은 그 사이 상태가 흔들리기 때문입니다.
무효는 다릅니다. 처음부터 효력이 생기지 않으므로 누가 주장하든 같은 결론이고, 기간도 붙지 않습니다. 사회질서에 어긋나는 내용을 담은 행위나 상대와 짜고 한 거짓 표시가 여기에 속합니다.
그래서 무효의 범위를 어디까지로 잡느냐가 곧바로 손익을 가릅니다.
일부가 무효면 전부가 무너지나
원칙은 무너집니다. 제137조 본문이 법률행위의 일부분이 무효인 때 그 전부를 무효로 한다고 적고 있습니다.
얼핏 가혹해 보이지만 이유가 있습니다. 하나의 약정은 여러 조항이 서로를 떠받치며 값과 조건을 맞춘 결과물입니다. 그 가운데 하나를 도려낸 채 나머지를 강제하면, 당사자가 동의한 적 없는 계약을 법이 새로 만들어 주는 셈이 됩니다.
단서가 그 원칙을 되돌립니다. 그 무효부분이 없더라도 법률행위를 하였을 것이라고 인정될 때에는 나머지 부분은 무효가 되지 아니합니다. 판단의 축은 가정적 의사입니다. 실제로 무슨 생각을 했느냐가 아니라, 그 조항이 없는 상태를 알았다면 그래도 계약했겠는가를 묻습니다.
분리가 가능한 구조인지가 먼저입니다.
가정적 의사
당사자가 실제로 표시한 뜻이 아니라, 무효라는 사정을 알았더라면 어떤 선택을 했을지를 계약의 목적과 거래 관행에 비추어 추정한 것입니다. 제137조 단서와 제138조가 모두 이 잣대를 씁니다.
다른 법률행위로 살아나는 길
제138조가 그 통로입니다. 무효인 법률행위가 다른 법률행위의 요건을 구비하고, 당사자가 그 무효를 알았더라면 다른 법률행위를 하는 것을 의욕하였으리라고 인정될 때에는 다른 법률행위로서 효력을 가집니다.
문장 안에 두 개의 문턱이 들어 있습니다. 앞의 것은 객관적인 문턱입니다. 원래 하려던 행위가 갖추지 못한 요건을 이유로 죽었더라도, 그 내용이 다른 제도의 요건은 고스란히 채우고 있어야 합니다.
뒤의 것은 주관적인 문턱입니다. 그 다른 모양이라도 좋다고 여겼을 것이라는 판단이 서야 합니다. 값이나 책임의 무게가 크게 달라지는 전환이라면 이 문턱을 넘기 어렵습니다.
둘 다 채워야 열립니다.
어떤 자리에서 전환이 문제 되는가
형식을 엄격하게 요구하는 제도의 언저리입니다.
법이 정한 방식을 갖추지 못해 그 제도로서는 효력이 없지만, 담긴 내용 자체는 다른 제도의 틀에 그대로 들어맞는 경우가 있습니다. 이럴 때 전환을 인정하면 당사자가 애써 만든 합의가 통째로 사라지는 것을 막을 수 있습니다.
반대로 전환이 막히는 자리도 분명합니다.
- 무효의 이유가 내용 자체에 있는 경우입니다. 사회질서에 어긋나거나 현저하게 공정을 잃은 약정은 모양을 바꾸어도 같은 흠을 그대로 안고 있습니다.
- 다른 제도의 요건을 채우지 못하는 경우입니다. 빠진 요건이 있으면 바꿔 놓을 자리 자체가 없습니다.
- 한쪽에만 유리해지는 경우입니다. 전환의 결과 상대의 부담이 커진다면 그 뜻을 의욕했으리라고 보기 어렵습니다.
그래서 전환은 구제 장치이면서 좁은 문입니다.
추인하면 되살아나는가
되살아나지 않습니다. 제139조 본문은 무효인 법률행위는 추인하여도 그 효력이 생기지 아니한다고 단정합니다.
취소할 수 있는 행위를 추인하면 더 이상 취소하지 못하게 되어 효력이 굳어집니다. 무효는 이 구조와 다릅니다. 굳힐 효력이 처음부터 없었기 때문에 붙잡을 대상이 없습니다.
그런데 단서가 다른 길을 냅니다. 당사자가 그 무효임을 알고 추인한 때에는 새로운 법률행위로 봅니다. 과거의 행위가 되살아나는 것이 아니라, 추인한 시점에 같은 내용의 행위를 새로 한 것으로 다루는 것입니다.
차이는 날짜에서 드러납니다.
시점이 달라지면 무엇이 달라지나
이자와 기간, 그리고 제삼자의 자리가 달라집니다.
원래의 날짜로 소급하지 않으므로 그 사이에 쌓였을 이자나 지연손해금의 기산점이 추인한 날로 옮겨 갑니다. 소멸시효의 출발점도 마찬가지입니다.
제삼자의 권리도 영향을 받습니다. 무효인 상태에서 그 목적물에 관하여 권리를 얻은 사람이 있다면, 뒤늦은 추인으로 그 사람의 자리를 뒤로 밀어낼 수는 없습니다.
알고 했는지도 관건입니다. 단서는 무효임을 알고 추인할 것을 요구합니다. 유효한 줄 알고 이행을 계속한 것만으로는 새로운 행위로 보기 어렵습니다.
| 조문 | 다루는 국면과 결과 |
|---|---|
| 제137조 | 일부의 흠이 어디까지 번지는가. 원칙은 전부 무효, 가정적 의사가 인정되면 나머지 존속 |
| 제138조 | 죽은 행위를 다른 제도로 옮길 수 있는가. 요건 구비와 가정적 의사가 갖추어지면 그 행위로서 유효 |
| 제139조 | 뒤늦게 붙잡으면 어떻게 되는가. 소급하지 않고, 알고 추인하면 그때 새로 한 행위 |
정리
세 조문은 무효를 다루는 태도를 단계적으로 보여 줍니다. 흠이 있는 부분을 도려내고 나머지를 살릴 수 있는지 먼저 보고, 그것이 어려우면 다른 제도의 옷을 입혀 볼 수 있는지 살핍니다.
두 길이 모두 막히면 남는 것은 추인입니다. 다만 추인은 과거를 되돌리지 않고 그 시점부터의 효력만 만들어 내므로, 기간과 이자, 제삼자의 권리에서 결과가 달라집니다.
실무에서 갈림길은 결국 가정적 의사를 무엇으로 증명하느냐입니다. 협상 과정의 문서와 값의 산정 근거가 그 자료가 됩니다. 계약서 한 조항이 무효라는 말을 들으셨다면 문서 전체를 다시 읽고, 어느 길이 열려 있는지부터 변호사와 함께 짚어 보시기 바랍니다.
참조 조문
민법 제137조, 제138조, 제139조, 제146조
이 유형의 사건은 초기 대응 시점이 결과를 좌우합니다. 시간이 지난 뒤 후회하시기보다, 의문이 생기는 그 시점에 변호사와 상의하시기 바랍니다.
법무법인 대한중앙 한병철 변호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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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주 묻는 질문
계약서의 위약금 조항 하나가 무효라는데 계약 전체가 없어지나요?
원칙은 전부 무효이지만, 그 조항이 없었더라도 계약을 맺었으리라고 인정되면 나머지는 살아남습니다. 그 조항이 값의 산정에 얼마나 결정적이었는지가 판단의 축입니다.
전환은 당사자가 신청해야 인정되는 것인가요?
따로 신청하는 절차가 있는 것은 아니고, 다툼이 생겼을 때 법원이 요건을 갖추었는지 판단합니다. 다만 전환을 주장하는 쪽이 그 요건에 해당하는 사정을 제시해야 합니다.
무효인 줄 모르고 돈을 계속 냈습니다. 그것도 추인이 되나요?
민법 제139조 단서는 무효임을 알고 추인할 것을 요구합니다. 모르고 이행한 것만으로는 새로운 법률행위로 보기 어렵고, 낸 돈은 부당이득의 문제로 정리됩니다.
추인하면 처음 계약한 날짜로 돌아가나요?
돌아가지 않습니다. 추인한 때에 새로 한 행위로 보므로 이자와 기간의 기산점이 그 시점으로 옮겨 가고, 그 사이 권리를 얻은 사람의 자리도 밀려나지 않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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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검토: 한병철 변호사 · 2026-09-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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