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을 대신해 계약을 맺어 주는 사람이 그 계약의 상대방 자리에 함께 앉는 경우가 있습니다. 아들의 위임을 받아 땅을 팔면서 자기가 사는 형태, 파는 쪽과 사는 쪽을 한 사람이 모두 대리하는 형태입니다. 민법 제124조는 이런 배치를 원칙적으로 막아 두었습니다. 문장은 한 줄이지만 그 안에 허락이라는 열쇠와 채무의 이행이라는 예외가 함께 들어 있습니다. 막았는데도 해 버리면 계약이 어떻게 되는지 보겠습니다.
조문은 무엇을 막고 있나
두 가지 장면입니다.
제124조 본문은 대리인이 본인의 허락 없이 본인을 위하여 자기와 법률행위를 하거나, 동일한 법률행위에 관하여 당사자 쌍방을 대리하지 못한다고 정합니다. 앞이 자기계약, 뒤가 쌍방대리입니다.
이유는 이해의 충돌에 있습니다. 대리인은 본인에게 가장 유리한 조건을 끌어내야 하는데, 그 조건이 곧 자기 부담이 되면 판단이 한쪽으로 기울 수밖에 없습니다.
법은 실제로 기울었는지를 따지지 않습니다. 기울 수 있는 자리 자체를 치워 버리는 방식입니다. 오히려 본인에게 유리하게 처리했다는 주장으로도 금지를 벗어나지 못합니다.
자기계약과 쌍방대리
자기계약은 대리인이 본인을 대리하면서 자기를 계약의 상대방으로 삼는 것이고, 쌍방대리는 한 사람이 같은 법률행위에서 양쪽 당사자를 동시에 대리하는 것입니다. 둘 다 계약의 두 자리를 한 사람의 판단이 채웁니다.
본인이 허락하면 되는 일인가
됩니다. 조문이 허락이라는 조건을 앞세워 두었기 때문입니다.
보호 대상이 본인의 이익이므로, 정작 본인이 좋다고 하면 금지할 이유가 사라집니다. 방식에 제한은 없지만 실무에서는 서면으로 남깁니다.
허락은 구체적이어야 의미가 있습니다. 앞으로 있을 모든 거래를 알아서 하라는 식의 포괄적인 문구는 무엇까지 허락한 것이냐를 두고 다투게 됩니다. 어떤 물건을 어떤 조건으로, 누구를 상대로 하는 거래인지가 드러나야 합니다.
시점도 하나가 아닙니다. 미리 받는 것이 깔끔하지만, 해 버린 뒤에 받아들이는 형태도 가능합니다. 뒤쪽은 추인의 문제입니다.
채무의 이행은 왜 빠져 있나
단서 한 줄이 붙어 있습니다. 채무의 이행은 할 수 있다고만 적혀 있습니다.
이미 정해진 것을 그대로 옮기는 일이기 때문입니다. 새로운 이해관계가 생기지 않는 행위라면 대리인이 양쪽에 서 있어도 본인이 손해를 볼 여지가 없습니다. 빌린 돈의 원금을 정해진 날짜에 갚는 행위, 성립한 매매에 따라 이전등기를 신청하는 행위가 여기에 가깝습니다.
경계에서 갈립니다.
이행이라는 이름을 붙였더라도 그 안에서 새 조건이 정해진다면 단서가 닿지 않습니다. 변제기를 늦추거나, 일부만 받고 나머지를 면제하거나, 다른 물건으로 대신 갚기로 하는 합의가 그렇습니다.
| 행위 | 성격 | 제124조의 적용 |
|---|---|---|
| 정해진 날 원금을 그대로 변제 | 채무의 이행 | 단서에 따라 허락 없이 가능합니다. |
| 변제기를 미루기로 합의 | 새로운 약정 | 본인의 허락이 필요합니다. |
어기고 한 계약은 무효인가
바로 무효가 되지는 않습니다. 대리권 없이 한 행위와 같은 취급을 받습니다.
제130조는 대리권 없는 자가 타인의 대리인으로 한 계약은 본인이 추인하지 아니하면 본인에 대하여 효력이 없다고 정합니다. 효력이 없다는 말이 소멸을 뜻하지는 않습니다. 본인의 결정을 기다리는 상태라는 뜻입니다.
본인이 받아들이면 제133조에 따라 추인은 계약 시로 소급합니다. 같은 조 단서가 제삼자의 권리를 해하지 못한다는 한계를 둡니다.
상대방에게도 수단이 있습니다. 제131조는 상당한 기간을 정해 추인 여부의 확답을 요구할 수 있게 하고, 그 기간 안에 확답을 발하지 않으면 추인을 거절한 것으로 봅니다. 제134조는 추인이 있을 때까지 상대방이 철회할 수 있게 하되, 계약 당시 대리권 없음을 알았던 상대방은 제외합니다.
주의
추인을 받지 못해 계약이 효력을 잃으면 대리인이 책임을 집니다. 제135조 제1항은 대리권을 증명하지 못하고 추인도 받지 못한 경우 상대방의 선택에 따라 계약을 이행하거나 손해를 배상할 책임이 있다고 정합니다.
가족과 법인에는 별도의 장치가 있다
이해가 맞부딪히는 관계에서는 민법이 자리를 바꿔 놓습니다.
제921조 제1항은 법정대리인인 친권자와 그 자녀 사이에 이해가 상반되는 행위를 할 때 친권자가 법원에 그 자녀의 특별대리인 선임을 청구하도록 합니다. 제2항은 친권에 따르는 여러 자녀 사이에 이해가 상반되는 경우에도 한쪽을 위한 특별대리인을 선임하게 합니다. 상속재산 분할에서 자주 문제 됩니다.
법인 쪽에도 같은 발상이 있습니다.
제64조는 법인과 이사의 이익이 상반하는 사항에 관하여 이사에게 대표권이 없다고 선언하고 특별대리인을 선임하도록 합니다. 대표이사가 개인 자격으로 법인과 거래하는 장면이 전형입니다.
제124조가 허락으로 풀리는 데 비해 이쪽은 법원이 선임한 사람을 세우라는 구조입니다. 미성년 자녀나 법인이 허락의 주체가 되기 어렵기 때문입니다.
실제로 어디서 문제가 생기나
걸리는 장면은 몇 가지로 모입니다.
- 부모가 자녀 명의 부동산을 자신에게 파는 경우
- 한 사람이 매도인과 매수인의 위임장을 모두 받아 계약서를 쓰는 경우
- 회사 대표가 회사 자금을 자기에게 빌려주는 계약을 맺는 경우
- 공동상속인 한 사람이 나머지를 대리해 분할협의를 하는 경우
- 채권자가 담보물 처분 권한을 받아 스스로 매수하는 경우
마지막 유형이 특히 잦습니다. 담보물을 팔아 변제에 충당하라는 위임을 받고 그 물건을 자기가 사 버리는 형태입니다.
등기 실무에서는 서류가 먼저 걸립니다. 양쪽 위임장에 같은 이름이 있으면 소명을 요구받습니다.
미리 갖출 것은 많지 않습니다.
- 거래 구조를 그려 한 사람이 두 자리를 채우는지 봅니다.
- 있다면 채무의 이행에 그치는지, 새 조건을 정하는 것인지 가릅니다.
- 새 조건이 있다면 대상과 조건을 특정해 본인의 허락을 서면으로 받습니다.
- 미성년 자녀나 법인이 얽혔다면 특별대리인 선임이 필요한지 봅니다.
세 번째가 핵심입니다. 허락 문서 한 장이면 끝났을 사안이 긴 소송으로 가곤 합니다.
확인할 것
· 위임장의 대리인이 상대방 자리에도 서 있는지
· 본인의 허락이 서면으로 있고 대상과 조건이 특정되었는지
· 그 행위가 정해진 채무를 그대로 이행하는 것인지
· 미성년 자녀나 법인이라면 특별대리인이 선임되었는지
· 추인 여부를 묻는 최고를 받았다면 기간이 언제까지인지
정리
제124조는 대리인이 계약의 두 자리를 함께 채우는 것을 원칙적으로 금지합니다. 실제 손해를 묻지 않고 그럴 수 있는 구조를 막는 방식이며, 열쇠는 본인의 허락입니다.
정해진 채무를 그대로 이행하는 일은 단서에 따라 허락 없이도 됩니다. 반면 기한을 바꾸거나 일부를 면제하는 합의는 새 약정입니다. 여기에는 단서가 닿지 않습니다.
어기고 한 계약은 무권대리로 다루어져 추인을 기다리는 상태가 되고, 추인이 없으면 대리인이 이행이나 배상의 책임을 집니다. 계약서와 위임장을 들고 변호사와 상의하시기 바랍니다.
참조 조문
민법 제64조, 제124조, 제130조, 제131조, 제133조, 제134조, 제135조, 제921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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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주 묻는 질문
아버지가 제 명의 땅을 본인에게 파는 계약을 했습니다.
본인의 허락이 없었다면 제124조에 저촉되어 무권대리로 다루어집니다. 그 계약을 받아들이면 제133조에 따라 계약 시로 소급해 효력이 생기므로, 추인할 뜻이 없다면 분명히 밝혀 두셔야 합니다.
한 법무사가 매도인과 매수인을 모두 대리해 등기를 넘겼습니다.
이미 성립한 매매에 따른 등기신청은 채무의 이행에 가까워 단서의 범위로 볼 여지가 있습니다. 다만 계약 조건을 그 자리에서 새로 정했다면 성격이 달라지므로 위임장을 확인해야 합니다.
상속재산 분할협의를 형이 저희 모두를 대리해 했습니다.
공동상속인 사이는 이해가 맞부딪히는 관계여서 한 사람이 다른 상속인들을 대리하는 형태는 문제가 됩니다. 미성년 상속인이 있다면 제921조의 특별대리인 선임이 필요했는지도 따져야 합니다.
추인하겠느냐고 묻는 서면을 받았는데 답하지 않으면 어떻게 되나요?
제131조는 상당한 기간을 정한 최고에 그 기간 안에 확답을 발하지 않으면 추인을 거절한 것으로 봅니다. 계약을 유지할 뜻이 있다면 기간 안에 답하셔야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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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검토: 한병철 변호사 · 2026-09-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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