계약서에 도장을 찍은 날, 사실은 그 목적물이 이미 세상에 없었던 경우가 있습니다. 전날 화재로 타 버린 건물을 사고팔았거나, 이미 수용되어 개인이 처분할 수 없게 된 토지를 대상으로 삼은 경우입니다. 이런 계약은 지킬 방법이 없으니 무효로 다루어집니다. 그런데 그 말을 듣기 전까지 상대방은 잔금을 마련하고 이사 준비를 하며 돈과 시간을 썼습니다. 민법 제535조는 바로 그 지출을 겨냥해 한 사람에게 책임을 지웁니다.
처음부터 불가능하다는 말의 뜻
시점이 갈림길입니다.
계약을 맺기 전에 이미 이행할 수 없는 상태였다면 원시적 불능이고, 계약을 맺은 뒤에 그렇게 되었다면 후발적 불능입니다. 같은 화재라도 계약 전날이냐 다음 날이냐에 따라 적용되는 조문이 완전히 달라집니다.
원시적 불능인 계약은 애초에 실현될 수 없는 내용을 담고 있어 효력을 인정하기 어렵습니다. 그래서 채무불이행 책임을 물을 계약 자체가 존재하지 않습니다. 이 빈자리를 메우려고 마련된 조문이 제535조입니다.
계약체결상의 과실
계약이 성립하지 않았거나 무효인 경우에도, 계약을 맺는 과정에서 상대방에게 부당한 신뢰를 심어 준 쪽이 그 신뢰가 깨져 생긴 손해를 물어야 한다는 법리입니다. 민법은 목적이 불능한 계약 하나에 대해서만 이를 조문으로 명시해 두었습니다.
조문은 누구에게 책임을 지우나
알았거나 알 수 있었던 쪽입니다.
제535조 제1항은 목적이 불능한 계약을 체결할 때에 그 불능을 알았거나 알 수 있었을 자가, 상대방이 그 계약의 유효를 믿었음으로 인하여 받은 손해를 배상하여야 한다고 정합니다.
문장에 악의라는 말만 있지 않다는 점이 중요합니다. 알 수 있었을 자까지 포함되어 있으므로, 몰랐다는 해명만으로는 벗어나지 못합니다. 자기가 팔겠다고 내놓은 물건의 상태를 확인하지 않은 매도인은 대개 알 수 있었던 쪽으로 평가받습니다.
책임의 근거는 계약이 아닙니다. 계약은 무효이기 때문입니다. 근거는 계약을 맺는 과정에서 상대에게 헛된 믿음을 만들어 주었다는 사실 자체에 있습니다.
배상 대상인 손해는 어디까지인가
조문이 손해의 성격을 직접 적었습니다. 상대방이 그 계약의 유효를 믿었음으로 인하여 받은 손해입니다. 계약이 지켜졌다면 얻었을 이익이 아니라, 계약을 믿고 움직였기 때문에 나간 돈입니다. 이를 신뢰이익이라고 부릅니다.
어떤 항목이 여기 들어갈까요.
- 계약서 작성과 중개에 들어간 수수료
- 목적물을 보러 다니며 쓴 비용
- 등기 이전을 준비하며 낸 세금과 보수
- 잔금을 마련하려고 받은 대출의 이자
반대로 그 부동산을 되팔아 남겼을 차익은 여기 들어가지 않습니다. 계약이 유효했을 때 생겼을 이익이기 때문입니다.
| 구분 | 신뢰이익 | 이행이익 |
|---|---|---|
| 기준 상태 | 계약을 맺지 않았다면 있었을 자리 | 계약이 지켜졌다면 있었을 자리 |
| 대표 항목 | 계약 비용, 준비 비용, 대출 이자 | 전매 차익, 사용 수익 |
| 제535조에서의 지위 | 배상 대상 | 배상액의 상한 |
이행이익이 천장이 되는 까닭
제1항 뒤에 단서가 붙어 있습니다. 배상액은 계약이 유효함으로 인하여 생길 이익액을 넘지 못한다는 문장입니다.
왜 이런 한계를 두었을까요. 계약이 제대로 지켜졌을 때보다 무효로 끝났을 때 더 많이 받는다면 결과가 뒤집히기 때문입니다. 무효인 계약이 유효한 계약보다 이득인 상황을 법이 만들 이유가 없습니다.
실무에서는 이 단서가 실제로 작동합니다. 헐값에 사기로 한 물건이라 이행이익이 컸다면 상한이 높아 신뢰이익 전부를 받을 수 있지만, 시세대로 사기로 한 거래여서 이행이익이 크지 않다면 지출한 비용을 다 받지 못하는 경우가 생깁니다. 두 금액을 함께 계산해 두어야 합니다.
상대방도 알고 있었다면
제2항이 문을 닫습니다. 상대방이 그 불능을 알았거나 알 수 있었을 경우에는 제1항을 적용하지 아니합니다.
양쪽 다 알았다면 보호할 신뢰가 없습니다. 유효를 믿었다는 전제 자체가 성립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조문이 알 수 있었을 경우까지 배제 사유로 삼은 점도 눈여겨보셔야 합니다.
그래서 다툼은 대개 여기서 벌어집니다. 매수인이 현장을 한 번이라도 가 보았는지, 등기사항증명서나 토지이용계획을 확인했는지, 중개인에게 어떤 설명을 들었는지가 쟁점이 됩니다. 이 조문에는 과실상계처럼 금액을 깎는 구조가 아니라 전부 아니면 전무의 구조가 들어 있어, 결론의 낙차가 큽니다.
주의
계약 전에 목적물을 확인하지 않았다는 사실이 기록으로 남으면 제2항에 걸릴 위험이 커집니다. 현장 방문 일자, 받아 본 서류의 발급일, 상대가 보낸 설명 문자는 그대로 보관하십시오. 확인을 했는데도 알 수 없었다는 점을 보여 주는 자료가 결국 청구의 성패를 가릅니다.
계약 뒤에 불가능해졌다면 어느 조문으로 가나
다른 길입니다. 이때는 계약이 유효하게 성립했으므로 채무불이행과 위험부담의 문제로 넘어갑니다.
상대에게 책임 있는 사유로 이행할 수 없게 되었다면 제390조가 적용되어 손해배상을 청구할 수 있습니다. 여기서는 이행이익이 배상 범위에 들어옵니다. 어느 쪽에도 책임이 없다면 제537조의 채무자위험부담이 작동해, 채무자는 상대방의 이행도 청구하지 못합니다.
정리하면 이렇습니다. 계약 전이면 제535조로 신뢰이익까지, 계약 후이면 제390조로 이행이익까지입니다. 계약일과 사고일을 나란히 놓고 보는 일이 사건의 첫 단추입니다.
착오 취소와는 어떻게 갈리나
겹쳐 보이지만 전제가 다릅니다.
제109조의 착오 취소는 계약이 유효하게 성립했음을 전제로, 중요 부분에 착오가 있었으니 그 효력을 없애 달라는 주장입니다. 제535조는 계약이 이미 무효인 상태에서 그 과정의 비용을 물어내라는 주장입니다. 출발선이 다릅니다.
둘 다 중대한 과실이나 알 수 있었는지를 따진다는 점은 닮았습니다. 제109조 제1항 단서는 표의자의 중대한 과실로 인한 착오의 취소를 막고, 제535조 제2항은 알 수 있었던 상대방의 청구를 막습니다. 결국 어느 쪽으로 가든 본인이 무엇을 확인했는가가 관건입니다.
확인할 것
· 계약 체결일과 목적물이 사라지거나 처분할 수 없게 된 날의 선후
· 상대가 그 사정을 언제 알았는지를 보여 주는 문자나 메일
· 내 쪽에서 확인한 서류의 발급일과 현장 방문 기록
· 계약 이후 지출한 비용의 영수증과 대출 이자 내역
· 계약이 지켜졌을 때 얻었을 이익을 계산한 자료
정리
제535조는 무효인 계약에서 생긴 손해를 다루는 드문 조문입니다. 계약이 없으니 채무불이행도 없지만, 헛된 믿음을 만든 쪽이 그 대가를 치르게 한다는 취지가 담겨 있습니다.
세 가지만 기억하시면 됩니다. 불능을 알았거나 알 수 있었던 쪽이 물고, 배상 대상은 유효를 믿어 지출한 신뢰이익이며, 그 금액은 이행이익을 넘지 못합니다. 상대방도 알았거나 알 수 있었다면 청구 자체가 서지 않습니다.
사건의 승패는 대부분 언제 무엇을 알았느냐에서 갈립니다. 계약일 전후의 자료를 시간 순으로 묶어 두시고, 지출 항목과 이행이익을 함께 계산한 뒤 변호사와 청구 범위를 정하시기 바랍니다.
참조 조문
민법 제109조, 제390조, 제535조, 제537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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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주 묻는 질문
계약 전날 건물이 탔다는 사실을 나중에 알았습니다.
원시적 불능에 해당해 계약 자체가 무효로 다루어지므로, 잔금 반환과 별개로 제535조에 따른 배상을 검토하게 됩니다. 매도인이 화재 사실을 알았거나 알 수 있었는지, 본인은 알 수 없었는지를 보여 주는 자료를 먼저 모으셔야 합니다.
되팔아 남겼을 이익도 청구할 수 있습니까?
전매 차익은 계약이 유효했을 때 생겼을 이행이익이라 배상 대상에서 벗어납니다. 다만 그 금액이 배상의 상한을 정하는 기준이 되므로, 청구를 포기하더라도 계산해 두는 편이 유리합니다.
등기부는 보았지만 현장에는 가 보지 않았습니다.
알 수 있었는지가 쟁점이 됩니다. 등기부에 드러나지 않는 사정이었다면 확인 가능성이 낮았다고 볼 여지가 있으므로, 어떤 서류를 언제 받아 무엇을 확인했는지를 시간 순으로 정리해 두십시오.
계약을 맺은 다음 날 목적물이 없어졌습니다.
이 경우는 후발적 불능이라 제535조가 아니라 채무불이행과 위험부담 쪽으로 갑니다. 상대에게 책임 있는 사유가 있었다면 제390조로 이행이익까지 물을 수 있으니, 사고 원인과 시점을 먼저 확정하셔야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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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검토: 한병철 변호사 · 2026-10-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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