받을 돈을 오래 두면 권리가 사라진다는 말은 널리 알려져 있습니다. 그래서 기한이 다가오면 서둘러 소를 내거나 가압류를 겁니다. 그런데 그 조치를 마친 뒤에 남는 물음은 잘 다루어지지 않습니다. 지금까지 흘러간 시간이 잠시 멈추었다가 이어지는 것인지, 아니면 처음부터 다시 시작하는 것인지입니다. 민법은 후자를 택했습니다. 그전에 지난 기간을 아예 계산에 넣지 않는 방식이고, 그래서 중단이라는 단어의 무게가 달라집니다. 어떻게 다시 세는지 살펴보겠습니다.
중단은 멈춤이 아니다
지워 버리는 쪽에 가깝습니다.
민법 제178조 제1항은 시효가 중단된 때 중단까지에 경과한 시효기간은 이를 산입하지 아니하고 중단사유가 종료한 때로부터 새로이 진행한다고 적었습니다. 잠시 멈춘 뒤 이어 세는 것이 아니라, 이미 지난 시간을 없는 것으로 두고 백지에서 출발합니다.
정지와는 구조가 다릅니다. 정지는 일정한 사정이 있는 동안 완성을 미루어 주는 장치라서 그전의 기간이 그대로 살아 있습니다. 중단은 그 기간을 통째로 털어 냅니다.
그래서 한 번의 조치가 결과를 크게 바꿉니다.
중단과 정지
중단은 그때까지 쌓인 기간을 계산에서 빼고 다시 처음부터 세게 합니다. 정지는 쌓인 기간을 그대로 두고 완성될 시점만 뒤로 미룹니다. 같은 기간이 걸려 있어도 남은 시간이 전혀 달라집니다.
무엇이 있어야 중단이 걸리나
제168조가 세 가지를 열거합니다. 청구, 압류 또는 가압류와 가처분, 그리고 승인입니다.
세 가지의 성격은 서로 다릅니다. 앞의 둘은 권리자가 움직여 만들어 내는 것이고, 마지막 하나는 의무자 쪽의 태도에서 나옵니다. 일부를 갚거나 갚겠다고 적어 준 문서가 승인으로 평가되면 그 순간 기간이 새로 시작됩니다.
승인에는 문턱이 낮게 잡혀 있습니다. 제177조는 시효중단의 효력있는 승인에 상대방의 권리에 관한 처분의 능력이나 권한이 있을 것을 요하지 아니한다고 정합니다. 처분 권한이 없는 사람의 인정도 승인이 될 수 있다는 뜻입니다.
무심코 보낸 문자 한 통이 여기에 걸립니다.
다시 세는 출발선은 어디인가
중단사유가 끝난 때입니다. 다만 그 끝이 언제인지는 사유마다 다릅니다.
재판상 청구의 경우를 제178조 제2항이 따로 적었습니다. 재판상의 청구로 인하여 중단한 시효는 재판이 확정된 때로부터 새로이 진행합니다. 소를 낸 날이 아니라 판결이 확정된 날이 출발선이므로, 심급을 거치며 걸린 시간만큼 뒤로 밀립니다.
압류나 가압류는 그 절차가 계속되는 동안 상태가 유지되다가 끝난 때부터 다시 흐릅니다. 승인은 그 의사가 도달한 시점에 곧바로 종료하므로 그날부터 세면 됩니다.
날짜를 특정할 자료를 남겨 두어야 합니다.
재판을 거치면 기간 자체가 바뀐다
길이가 달라지는 대목이 있습니다.
제165조 제1항은 판결에 의하여 확정된 채권이 단기의 소멸시효에 해당한 것이라도 그 소멸시효를 10년으로 한다고 정합니다. 제2항은 파산절차에 의하여 확정된 채권과 재판상의 화해, 조정 그 밖에 판결과 동일한 효력이 있는 것으로 확정된 채권에도 같은 규칙을 적용합니다.
짧은 기간이 걸려 있던 채권을 가진 사람에게는 이 조항이 실익의 핵심입니다. 판결을 받아 두면 다시 세는 기간이 본래보다 길어지기 때문입니다.
다만 제3항이 예외를 둡니다. 판결확정 당시에 변제기가 도래하지 아니한 채권에는 적용하지 아니하므로, 아직 갚을 때가 오지 않은 부분까지 10년으로 늘어나지는 않습니다.
걸어 둔 중단이 무너지는 경우
조치를 했다고 안심할 수 없습니다.
제170조 제1항은 재판상의 청구가 소송의 각하, 기각 또는 취하의 경우에는 시효중단의 효력이 없다고 정합니다. 처음부터 중단이 없었던 것으로 되므로, 그 사이 흘러간 시간이 고스란히 계산에 들어옵니다.
구제의 여지는 남아 있습니다. 같은 조 제2항은 그 경우 6개월 안에 재판상의 청구나 파산절차참가, 압류 또는 가압류, 가처분을 하면 최초의 재판상 청구로 인하여 중단된 것으로 본다고 적었습니다.
내용증명만 보낸 경우도 같은 구조입니다. 제174조는 최고가 6개월 안에 재판상의 청구나 파산절차참가, 화해를 위한 소환, 임의출석, 압류 또는 가압류, 가처분으로 이어지지 아니하면 중단의 효력이 없다고 합니다. 독촉장 한 장으로 확보되는 것은 6개월의 시간뿐입니다.
| 한 조치 | 다시 세기 시작하는 때 |
|---|---|
| 소를 제기해 판결을 받음 | 재판이 확정된 때. 확정된 채권은 10년 |
| 소가 각하되거나 취하됨 | 중단이 없었던 것으로. 6개월 안에 다시 조치하면 처음 청구 시점으로 인정 |
| 최고를 보냄 | 6개월 안에 소 제기 등으로 이어져야 효력 유지 |
| 채무자가 일부를 갚거나 인정함 | 그 의사가 도달한 때부터 다시 진행 |
미리 포기하지 못하게 한 이유
제184조 제1항이 소멸시효의 이익을 미리 포기하지 못한다고 못 박았습니다.
돈을 빌리는 자리는 대등하지 않습니다. 당장 돈이 필요한 쪽은 내미는 서류에 담긴 조항을 따지기 어렵고, 시효를 주장하지 않겠다는 문구 하나쯤은 가볍게 넘기게 됩니다. 그 문구가 그대로 통한다면 제도 전체가 계약서 한 줄로 무력해집니다.
그래서 금지되는 것은 완성 전의 포기입니다. 시효가 이미 완성된 뒤에 그 이익을 포기하는 것은 스스로 판단해 내린 처분이므로 막지 않습니다. 완성된 사실을 알면서 갚겠다고 적어 준 문서가 그렇게 평가될 수 있습니다.
기간을 손보는 약정은 어디까지 되나
한쪽 방향만 열려 있습니다.
제184조 제2항은 소멸시효를 법률행위에 의하여 배제, 연장 또는 가중할 수 없으나 이를 단축 또는 경감할 수 있다고 정합니다. 기간을 늘리거나 조건을 무겁게 하는 합의는 효력이 없고, 줄이거나 가볍게 하는 합의는 유효하다는 것입니다.
방향을 이렇게 가른 까닭은 제1항과 같습니다. 늘리는 합의는 결국 포기와 같은 결과를 낳습니다. 줄이는 합의는 권리자가 스스로 자기 권리를 좁히는 것이라 막을 이유가 없습니다.
- 시효를 주장하지 않겠다는 사전 약정은 효력이 없습니다.
- 기간을 20년으로 늘리자는 특약도 마찬가지입니다.
- 기간을 1년으로 줄이자는 특약은 유효할 수 있습니다.
- 완성된 뒤에 갚겠다고 한 의사표시는 포기로 평가될 수 있습니다.
정리
중단은 시계를 멈추는 장치가 아니라 되감는 장치입니다. 그때까지 흘러간 기간을 계산에서 빼고 사유가 끝난 때부터 다시 세며, 재판상 청구라면 그 출발선이 판결 확정일이 됩니다.
조치를 했다는 사실만으로 안심하기는 이릅니다. 소가 각하되거나 취하되면 중단이 없었던 것이 되고, 최고는 6개월 안에 다음 조치가 따라야 살아남습니다.
반대편의 규칙도 함께 보아야 합니다. 완성 전에 시효 이익을 포기하게 하는 약정과 기간을 늘리는 특약은 효력이 없지만, 줄이는 특약은 유효할 수 있습니다. 남은 기간이 얼마인지 계산이 서지 않으면 그동안의 조치 내역과 문서를 모아 변호사와 날짜부터 맞추어 보시기 바랍니다.
참조 조문
민법 제165조, 제168조, 제170조, 제174조, 제177조, 제178조, 제184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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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주 묻는 질문
가압류를 걸어 두면 그 상태가 이어지는 동안 기간은 흐르지 않나요?
절차가 계속되는 동안 중단 상태가 유지되고, 그것이 끝난 때부터 새로 세게 됩니다. 다만 절차가 취소된 사정에 따라 중단의 효력 자체가 부정될 수 있으니 취소 사유를 확인하십시오.
채무자가 이자만 조금 보냈습니다. 이것도 승인인가요?
일부 변제가 남은 채무를 인정하는 뜻으로 평가되면 승인이 되어 그날부터 다시 세게 됩니다. 입금 내역과 함께 보낸 문자나 메모가 판단 자료가 됩니다.
내용증명을 매년 한 번씩 보내면 기간이 계속 늘어나나요?
늘어나지 않습니다. 최고는 6개월 안에 소 제기 같은 조치로 이어지지 않으면 효력이 없으므로, 반복해 보내는 것만으로는 확보되지 않습니다.
빌려줄 때 시효를 주장하지 않겠다는 각서를 받아 두었습니다.
완성 전의 포기는 민법 제184조 제1항에 따라 효력이 없습니다. 기간을 늘리는 특약도 같으므로, 각서가 아니라 판결을 받아 두는 쪽이 실제로 기간을 확보하는 방법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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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검토: 한병철 변호사 · 2026-09-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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